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케메네스 왕조/역사 (문단 편집) == 쇠락과 각지의 반란 ==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기원전 358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다. 원래라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황제가 될 자격이 아니었지만 장자 다리우스 왕자는 지나치게 오래 사는 아버지를 쫒아내고 하루빨리 왕위에 오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다 잡혀죽었고, 차남 아리아스페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끊임없는 술수에 말려서 죽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아르사메스 왕자를 새 황태자로 세웠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 아르사메스 왕자마저도 죽여버리고 새 황제에 등극한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은 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즉위하자마자 서부 지방을 관할하는 사트라프들의 힘을 빼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아버지 시절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이 대란을 일으킨 것을 보고 더이상 사트라프들에게 서부 지방을 맡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사트라프들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특히 피리기아 지방의 아르타바조스 2세는 대놓고 황명을 씹었다. 아르타바조스 2세는 [[아테네]]에 구원 요청을 보냈고, 그는 아테네와 타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354년 페르시아의 진압군마저 꺾었다. 하지만 기원전 353년에 끝내 진압군에 격퇴당했고 [[필리포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도망쳐 몸을 의탁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일시적으로나마 평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제 선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절 독립해 떨어져나간 이집트로 눈길을 돌렸다. 이집트는 이미 넥타네보 1세 시절에 독립을 되찾아 이 당시에는 [[넥타네보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워낙에 이집트의 부와 재화가 압도적이다보니 페르시아로서는 도저히 포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51년 대군을 일으켜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넥타네보 2세]]의 전술에 말려 패배했다. 넥타네보 2세가 페르시아에 대승을 거두자 안그래도 뒤숭숭하던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페니키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등에서 동시에 반란이 일어나 독립을 선포했고 이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카리아의 왕자 이드리에우스에게 키프로스 정복을 맡겼고 시리아의 사트라프 벨레시스에게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시돈을, 킬리키아의 사트라프 마자에우스에게 페니키아 안정을 맡겼다. 그러나 페니키아를 진압하라고 보낸 벨레시스와 마자에우스가 둘다 이집트에게서 4만의 지원을 받은 시돈의 왕 테네스에게 격파당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끌고 페니키아로 원정을 떠난다. 황제는 무려 33만의 대군을 이끌고 시돈을 몰아쳤다. 엄청난 대군에 경악한 시돈의 왕 테네스는 스스로 항복했고 시돈의 고위 시민 500여 명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시돈은 불타 무너져내렸고 테네스 역시 얼마 있다가 살해당했다. [[파일:Meeting_Between_Cambyses_II_and_Psammetichus_III.jpg]] 펠루시움 전투의 상상화. 이 전투로 이집트가 무너지고 다시 페르시아에 편입되었다. 시돈의 반란을 꺾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집트로 2차 원정을 떠났다. 이번에도 넥타네보 2세는 2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들을 포함한 10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페르시아에 맞섰지만 33만 명의 대군을 거느린 페르시아군을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잘하면 지류들이 빼곡한 이집트의 지형을 이용해 시간을 끌 수도 있었겠지만 넥타네보 2세에겐 그럴 듯한 계책도 그걸 실행할 유능한 장군도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넥타네보 2세의 군대 내에서 이집트인들고 그리스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재점령했다. 넥타네보 2세는 [[에티오피아]]로 도망쳐 행방불명됐고 페르시아는 다시 이집트를 식민지로 되찾는 데 성공한다. 이집트를 정복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정말 잔혹할 정도로 이집트를 수탈했다. 옛 [[다리우스 1세]]가 관용을 베풀었던 것과는 천지차이로 모든 신전들을 약탈했고 이집트 종교도 탄압, 세율도 극악할 수준으로 올렸다. 이렇게 쎄게 기를 꺾어놔버린 덕에 이집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는 페르시아에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다. 그는 강력한 군사 정책과 특유의 초토화 작전으로 반란의 싹 자체를 잘랐고, 덕분에 페르시아 제국은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지중해 최강 대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의 신임을 받던 환관 [[바고아스]]는 이집트 원정의 성공과 뛰어난 능력 덕에 제국의 행정을 책임졌다. 페르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이오니아와 리키아 지방의 옛 그리스 식민도시들을 모조리 재점령했고 아테네의 해상 식민지들도 모두 다시 뺏어왔다. 페르시아가 이렇게 옛 영토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들은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힘이 빠진지 오래라 전혀 페르시아에 대항할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아테네에서 페르시아를 공동으로 막자는 의견이 나오긴 했지만 그마저도 무시당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재위 말년 동안 페르시아는 그럭저럭 평화기를 구가했고 더이상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가장 경계하던 세력은 [[필리포스 2세]] 하에서 빠르게 성장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이었다. 마케도니아가 급속도로 커지자 페르시아는 트라키아 지방에 지원을 퍼부어 마케도니아에 흡수되는 것을 막았다. 격분한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와 함께 페르시아를 치고자 했으나 마케도니아를 야만족으로만 보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호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뿐 아니라 페르시아도 야만인으로 봤기에 둘이 쌤쌤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필리포스 2세가 당시 마케도니아의 국력을 신장시키며 그리스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걸 감안하면 그리스 입장에서는 마케도니아도 위험한 적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